결국 이모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다.
계속 집에서 4개월가까이 모시고 있었다. 치매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돌아가시기 몇일전에는 방바닥을 변으로 더럽히기 까지 했었다. 이 모든 뒤치닥 거리는 완전히 어머니의 차지셨고, 여동생이 그 보조를 했었다.
친할머니도 아닌 친할머니의 여동생인, 아버지 입장에서 이모 이신 할머니였다. 어떻게 보면 외갓댁의 위치 였고,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버리면 완전 남처럼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녀에겐 아들이 당당히 살아서 있었고, 호적상에도 보호자로써 존재했다. 그런 그녀는 치매증세와 함께,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와의 다툼과 별거 그리고 끝없는 논쟁. 그 결과 우리집에 모시게 되었고, 어머님께서 망설이시다가 결국 그녀를 모시게 된것이였다.
결국 대목이던 추석 다음날(음력 8월 16일)에 운명하셨고, 아버지의 외갓댁 분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도움을 주셨다. 그 때 많은 분들이 우리집 사람들을 칭찬과 고생에 대한 위로를 했다. 누구도 나서기 힘든 일을 자처하신 어머니나 여동생은 그 모든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여기저기 변을 묻히면 그것을 닦고 그녀를 목욕시키고, 식사를 돕고, 치우고 등등.. 그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도맡았으니까..
하지만, 남자인 아버지와 난 그런 도움은 한적이 없었다.
꺼리기 보다 그녀와 연관되기 싫었다고나 할까? 아버지는 이모였으니까, 그나마 말상대 정도는 하셨지만, 그 이상의 일은 하시지 않았다. 그런 우리였는데, 어머니와 여동생 덕에 얻은 칭호는 사실 껄끄러웠다.
아무것도 한것이 없는데 말이다.
모르겠다. 부모의 덕(德)에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그런의미일까?
계속 집에서 4개월가까이 모시고 있었다. 치매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돌아가시기 몇일전에는 방바닥을 변으로 더럽히기 까지 했었다. 이 모든 뒤치닥 거리는 완전히 어머니의 차지셨고, 여동생이 그 보조를 했었다.
친할머니도 아닌 친할머니의 여동생인, 아버지 입장에서 이모 이신 할머니였다. 어떻게 보면 외갓댁의 위치 였고,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버리면 완전 남처럼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녀에겐 아들이 당당히 살아서 있었고, 호적상에도 보호자로써 존재했다. 그런 그녀는 치매증세와 함께,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와의 다툼과 별거 그리고 끝없는 논쟁. 그 결과 우리집에 모시게 되었고, 어머님께서 망설이시다가 결국 그녀를 모시게 된것이였다.
결국 대목이던 추석 다음날(음력 8월 16일)에 운명하셨고, 아버지의 외갓댁 분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도움을 주셨다. 그 때 많은 분들이 우리집 사람들을 칭찬과 고생에 대한 위로를 했다. 누구도 나서기 힘든 일을 자처하신 어머니나 여동생은 그 모든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여기저기 변을 묻히면 그것을 닦고 그녀를 목욕시키고, 식사를 돕고, 치우고 등등.. 그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도맡았으니까..
하지만, 남자인 아버지와 난 그런 도움은 한적이 없었다.
꺼리기 보다 그녀와 연관되기 싫었다고나 할까? 아버지는 이모였으니까, 그나마 말상대 정도는 하셨지만, 그 이상의 일은 하시지 않았다. 그런 우리였는데, 어머니와 여동생 덕에 얻은 칭호는 사실 껄끄러웠다.
아무것도 한것이 없는데 말이다.
모르겠다. 부모의 덕(德)에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그런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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